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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소

[자연에게 말걸기 #.1] 비오는 5월의 지리산(智異山)




어진 지
겨우 삼일만에 벌써부터 지리산이 그립다. 다시 찾은 지리산은 2월의 그때보다 푸르렀다. 지난 겨울엔 하얀 눈꽃과 적막한 풍경으로 나를 반기더니 어느새 싱그러운 초록의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했다.

 

지난 2월 지리산을 종주할 때는 이 크고 웅장한 산을 원망하기도 했었음을 고백한다. 무슨 산이 이렇게 크기에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끝이 안 보이는지 짜증을 부렸었다. 죽을동 말동 도착지인 노고단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깨달았다. 산은 말없이 그대로인데, 빨리 오르려고 안달하고 역정을 낸 것은 나였다는 것을 말이다. 나에게도 산을 정복하려는 호기 같은 것이 있었나 반성하면서 이번에는 그저 묵묵히 산을 바라보며 둘레길을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예상 밖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그런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3일 내내 절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리산의 모습을 보는 것은 예상치 못한 색다른 감동이었다.

 


제나 그렇듯이 지리산의 넓은 품에 안길 때면 나는 오롯한 자연을 만난다. 법당 뒷마당의 축축히 젖은 땅 위에 뿌리박고 서있는 작은 새싹을 만났다. 이토록 작고 소박한 새싹이 얼굴에 흙을 묻히고 꼿꼿하게 서있는 것을 보니 대견스러웠다. ‘너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라고 말해주었다. 바닥으로 몸을 낮추어 새싹과 눈높이를 맞춰 보았다. 손가락 길이나 될까 말까 한 그 작은 새싹이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크고 넓었다.


이른 새벽 밖에 나가보니 비가 내려 산중턱까지 내려온 안개구름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연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하얀 구름 속 어딘가에 신선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빠른 속도로 고개를 넘어가는 안개구름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또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를 생각했다. 이 땅의 아픈 역사를 말없이 품은 지리산은 그 옛날 피 흘리며 투쟁하던 빨치산을 끌어 안았듯, 그날의 나도 말없이 끌어 안고 있었다. 한국전쟁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들이 밟았던 이 지리산 흙 위에 내가 서있다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었다. 내가 지리산을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지리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여기에 케이블카를 세우려고 한다거나 댐을 건설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늘 그렇듯이 지리산에 머물며 더욱 너그러워진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지리산아,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렴. 내 언제고 다시 너를 찾을 터이니.